▲ 케냐 지방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최섭씨가 바라 본 케냐의 초원.
불안, 20대를 지배하는 정서 코드. 사회가 아무리 20대에게 '젊은이다운 발랄함'을 주문해도 취업난, 저임금 등을 겪고 있는 20대의 정신은 점점 안으로 수그러들고, 어두워지고, 병들고 있다. 승자가 되려고 피 터지게 노력하면 할수록, 패기 넘치는 20대를 연기하면 할수록 마음의 병은 더욱 깊어진다.어느 날 훌쩍 케냐로 봉사활동을 떠났고, 또다시 케냐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20대 최섭(26, 광운대 국문과)씨. 지난 21일 광운대 근처 카페에서 만난 그는 편안하고 유쾌했지만 사실 케냐로 가기 전 그도 다른 20대와 같았다.2009년 초 군대를 제대한 그는 학교에 복학했다. 해병대에 자원입대하고, 혼자서 지리산 종주를 떠나고 이곳저곳 여행 다니기를 즐겼던 최섭씨는 어른들이 20대에게 꾸짖어 묻는 도전 정신과 패기를 한시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씩씩한 젊은이였고, 부모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장남이었으며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친구들도 많은 사람이었다.하지만 제대 이후 '한국의 평범한 20대'였던 그는 한동안 우울증을 앓았다. 종종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비둘기를 바라보는데도 눈물이 났고 갑자기 솟아오르는 슬픈 감정을 수습하기도 힘들었다."평화로운 주말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농구를 보면서 자장면을 시켜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날 좋은 주말에, 내가 좋아하는 자장면을 먹으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프로농구를 보는데 왜 나는 울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러다 그는 '죽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됐다고 한다. 잘 사는 것 같았던 그의 삶에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를 극단적인 생각으로까지 몰고 갔던 것은 눈에 잘 띄는 이유가 아닌 마음 속 허무와 외로움이었다. "내 삶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외롭고 허무했다."▲ 광운대 근처 커피숍에서 인터뷰 도중 최섭씨.
누구보다 활발하고 열심히 살았던 그, 하지만 왠지 모르게 당시의 삶이 힘들다기보다 허무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물리적으로 혼자는 아니었지만 군중 속에서 느끼는 고독이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지독하게 그를 괴롭혔다. 평화로운 주말 오후의 눈물...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된 케냐 생활▲ 마하나임 컬리지 한국어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케냐 학생들.
우울증과 자살 유혹에 시달렸던 최섭씨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준 것은 인터넷에서 본 사진 한 장이었다. 코끼리의 소변으로 머리를 감는 아프리카 소년의 사진. 최섭씨는 사진을 보고 아프리카로 떠난 이유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우선 이곳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고, 두 번째론 (그렇게 힘든 환경의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다."이후 그는 도서관 앞 포스터를 통해 알게 된 '굿뉴스코' 케냐 해외봉사단 활동에 참가하게 된다. 2010년 1월 케냐로 떠난 그가 10개월 동안 현지에서 한 일은 '굿뉴스코' 재단에 속한 '마하나임 컬리지'에서 현지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이었다.'마하나임 컬리지'는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등록금이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한 학생들과 수능을 보고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1년 가량의 시간이 걸리는 케냐 제도의 특성상 그 사이 동안 공부할 곳이 없는 학생들을 위한 곳이다. 학생들은 우리 돈으로 월 7000원 정도를 내고 컴퓨터, 한국어, 프랑스어, 중국어, 태권도, 피아노 수업을 듣는다.무슨 일이나 처음은 고되듯 최섭씨의 교사 적응 과정도 녹록지 않았다. 최씨가 오기 전까지 교사가 자주 교체됐던 탓인지 커리큘럼이 체계적이지 않았고, 한국어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 적었다. 컴퓨터나 중국어반에는 학생들이 수십 명씩 몰려들었지만 최씨가 가르치는 한국어반 학생은 단 두 명뿐이었다. 한국인이 설립한 학교이고 대다수 자원봉사자 선생님들이 한국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참 저조한 성적이었다.최씨는 직접 마케팅에 나섰다. 케냐의 한류 전도사로 변신, 노트북을 복도에 들고 나가 소녀시대, 포미닛 등 한국 아이돌그룹의 영상들을 학생들에게 구경(?)시켜주고 "꼬레야 컬처!"라고 외치며 주목을 끌었다. 마케팅은 효과가 있었다. 2명이던 학생이 7명으로 늘더니 이후 점점 증가해 40명 가까이까지 불어났다.최씨는 '소녀시대 마케팅'이 유효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업에도 열심이었다. 영어에 서툴렀던 그가 영어로 한국어를 가르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밤잠을 설쳐가며 수업 내용을 일일이 영어로 다 적어놓고 그것을 외우다시피 해서 수업을 이어나갔다. 그러기를 두어 달. 그렇게 전쟁을 치르듯 수업을 하다 보니 이후로는 웬만큼 편안하게 수업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자연히 가르치는 일에도 점점 자신감이 붙었고 보람도 더해갔다. "케냐로 다시 돌아오겠다" 결심하게 만든 사람들▲ 케냐 학생들 한국어 수업을 받는 케냐 학생들.
최씨는 나름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뜨거운 학구열'이 넘치는 한국 사회에서 자라왔던 그는 케냐 학생들이 지각을 자주 하거나, 숙제를 해오지 않을 때면 화가 치밀었다. 답답한 나머지 "이런 식으로 계속하면 이 반을 없애 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자신의 수업에서 배운 것을 제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길 바라는 야무진 선생님의 욕심에서였다.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변화가 학생들이 아닌 그에게서 일어났다. 2010년 8월, 최씨는 케냐 근처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NGO 문화행사를 돕기 위해 한 달 정도 교실을 비웠다. 다른 나라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며 행사를 돕는 것은 즐겁고 보람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그 '말도 지지리 안 듣던' 학생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고 그때 불현듯 하나의 결심이 그의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아, 나는 이걸 계속 해야겠다."그냥 "그들과 함께 있고 싶고, 같이 하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단다. 6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학생들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었다.그의 학생들은 "한국어를 배우는 것도 좋지만, 선생님이 좋으니까 같이 있고 싶어서 수업을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업의 효율성과 일의 타산적 목적을 중시하는 한국에서는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소통이 먼 땅 케냐에서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케냐 학생들이 먼저 그에게 마음을 주었고, 그는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았다.케냐에서의 순수하고 따뜻한 사람과의 관계는 졸업 이후 케냐로 다시 떠날 꿈을 꾸게 만들 만큼 그의 삶의 방향까지 케냐로 돌리게 만들었다."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어요. 지나가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 어디서든 한두 시간 동안이라도 서로의 진심을 나눌 수 있었죠." 케냐 사람들은 '저 사람이 나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나를 혹시 무시하진 않을까'하는 두려움이나 계산이 없었다. 누구나 어려운 집안 형편, 아픈 가정사,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까지 있는 그대로의 진짜 자신을 드러내며 이야기를 나눴고 자연스럽게 그도 자신의 속내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며 위로하고 위로받았다.▲ 마하나임 컬리지 한국어 수업 중인 최섭씨와 학생.물론 케냐에서의 삶이 늘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니 다투기도 많이 했다. 감정이 상하면 심한 욕까지 하며 '있는 힘껏' 싸웠다. 더 이상 잘 사는 나라에서 온 교양있는 봉사자 같은 건 없었고 봉사자에게 감사해야 하는 수혜자도 없었다. '사람 대 사람'의 진짜 관계만 있을 뿐이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최씨는 한국에서 자신을 우울하게 했던 허무와 외로움을 치유 받았다. 그때처럼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고 이런 저런 일들을 일부러 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존재를 매번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적게 쓰고 많이 느끼는 '폴레폴레'한 삶...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그곳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가졌고, 얼마나 멋져 보이는가에 따라 최씨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 줄 뿐이었다. 그래서 케냐에선 좋은 옷을 살 필요도 없었고, 머리에 왁스를 바르지 않아도 괜찮았다. 좋은 대화는 언제나 가능해서 한국에서처럼 사람을 만나고, 소통을 하기 위해 술이 필요하지도 않다. 여러 모임들도, 인터넷상의 인맥관리도 필요 없었다.최씨는 케냐에서 거의 돈을 쓰지 않고 몇 달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금 쓰며 작은 것에 만족하는 여유를 배웠다. 물론 비싼 음식이나 간식 등을 사먹기 힘든 형편의 학생들 속에서 한국에서처럼 맛있는 음식을 자주 먹을 기회는 적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2주에 한 번 먹는 콜라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빵도 일주일에 한 번씩 먹으면 그렇게 맛있어요."케냐에 더 머무르고 싶어 귀국을 미루던 그는 2011년 1월 비행기 1년 오픈티켓이 만료되기 하루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를 만난 친구들은 그를 보고 "많이 변했다"며 놀라워했다.▲ 르완데티 케냐 지방에 위치한 르완데티 마을 아이들과 최섭씨.
한국에서 태어나 20년 넘게 한국땅에서 자란 그이지만 1년 동안의 케냐 생활은 한국을 낯선 시각으로 보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는 '빨리빨리'가 중요하지만 케냐에서는 '폴레 폴레(천천히 천천히)'가 더 중요했다. 그들은 항상 "폴레 폴레"였다. 케냐 사람들이 자주 쓰는 다른 말은 "하쿠나 마타타(문제 없어)"다. '폴레 폴레'해도 '큰 문제 없는' 케냐였다. 갑자기 우리의 '빨리빨리 정신'을 버리고 살려는 그, 불안하지 않을까?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도 아닌 것 같았다."우리가 불안한 건 결국 돈과 연관된 문제가 많잖아요. 케냐 가기 전에 저는 더 심했어요. 자존심도 엄청 강해서 돈도 많이 벌고 싶어 했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죠. 그래서인지 항상 '나는 특별하다'는 자기 확인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이제 그런 욕구가 없어졌어요. 남들 시선보다 '내가 행복한가?'란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아 버렸거든요. 우리는 '취직을 해서 얼마나 돈을 벌까'가 늘 문제잖아요. 진짜 문제는 내가 그것을 해서 행복한가 아닌가 인데…"행복, 이 흔하고도 낯선 단어. 최씨는 "행복에 대해 알아버린 것 같다"며 "마음이 편안한 것"을 '행복한 상태'로 정의했다. 몸이 편안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한 것. 남이 봤을 때 행복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한 것. 졸업 후 케냐로 돌아가 한국어를 계속 가르치기 위해 그는 요즘 한국어교육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다. 평생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케냐에 정착해 한국어 선생님을 하면서 공부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케냐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마음을 공유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친구로서 말이에요."행복의 비밀을 알아 버려서일까? 주위의 우려 섞인 시선과 달리 최섭씨는 전혀 불안하지 않다. 걱정은 걱정하는 이의 것이고 행복은 행복한 이의 것. 그는 이젠 도망이 아닌 행복에 대한 확신을 갖고 케냐로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1년, 그는 많은 걸 소유하려는 욕심, 남들의 시선, 물질적 풍요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케냐에서 행복을 집어 올렸다.